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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조선의 왕과 그를 다룬 이야기 : 7대 왕 세조

by 하와나 2024. 4. 3.

부처님, 저를 살피소서



1. 조카를 몰아낸 냉혹한 삼촌, 수양대군 세조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세조는 형인 문종 사후에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였습니다.
1456년에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을 잡아 죽이고, 단종 또한 죽였습니다.
이에 분개한 생육신은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즉위 후에는 조선의 근간이 된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명하였으며, 이는 성종 대에 완성, 반포되었습니다.
태종이 실시하였던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고, 경연과 집현전을 폐지하고 왕의 직속 기구인 예문관을 강화해 왕권 강화에 힘썼습니다.
군사에도 관심이 깊어 중앙군에 5위, 지방에 진관체제를 마련하고 군사를 정비해 신숙주를 파견한 여진족 토벌에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유향소를 폐지하고 농민을 괴롭히는 토호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으며 직전법을 실시하여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 국가 수입을 크게 늘렸습니다.
특히 불교를 숭상해 이 시기 불교 경전과 불교 관련 서적들이 시중에 대량으로 유통, 불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나병을 앓으며 거듭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불교에 귀의하기도 하였지만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향년 52세의 나이에 승하하였습니다.

 


※ 사육신과 생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를 사육신이라 하며,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를 생육신이라 합니다.

 


※ 진관체제


15세기 세조 이후 실시되었던 지역 단위 방위 체제입니다.
각 도에 병영을 설치해 수령(지방관)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는 것으로 소규모 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대규모 외적 방어에 한계가 있었고, 군역을 쌀이나 돈으로 대신하는 대립제 등 군역이 문란해 짐에 따라 병력 자원이 줄어 전투력 유지가 어려워졌습니다.

 


※ 이시애의 난


세조 13년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이시애의 주동으로 일어난 봉기입니다.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는 북도 출신 수령은 임명을 제한하는 등 북쪽 변방 출신 장수를 불신했습니다.
반란의 주역인 이시애는 대대로 함길도에서 이름난 호족이었는데 세조의 중앙집권정책에 불만을 가진 다른 호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허나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을 위시한 관군의 진압으로 이시애는 결국 효수되었고 이시애가 난을 일으킬 세력을 모을 때 근거지로 삼았던 유향소가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직전법


전, 현직 모든 관리에게 토지를 주어 점차 세습화된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 관리들에게만 수조지를 지급한 제도입니다.
그 지급량이 품계마다 많이 감소하여 관리들은 퇴직 후의 생활에 대비하여 관직에 있을 때 대토지를 차지하여 농장이 확대되고 결국 국가의 농민 지배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 드라마 <왕과 비>

 


1998년에서 2000년까지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로 문종 사후부터 세조, 연산군에 이르는 약 50년간의 이야기가 다루어졌습니다.
세조역은 임동진이 맡았으며 대체로 수양대군을 미화하고 계유정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여 방영 당시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작가 정하연은 이에 대해 '권력의 무서움과 권력으로 인해 초래되는 인간성의 황폐화'를 그리려 의도했다고 합니다.

 

 


3. 영화 <관상>

 


2013년 한재림 감독의 작품인 관상은 실제 역사인 계유정난에 가상의 인물인 관상가가 개입되었다는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 사극 영화입니다.
관상가 역은 송강호, 수양대군 역은 이정재가 맡아 인상깊은 연기를 펼쳤는데,
특히 왼쪽 광대뼈 근처와 입가에 흉터를 지닌 채 천천히 수양대군이 등장하는 장면은 과히 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종서 역을 맡은 백윤식 배우와 연홍 역을 맡은 김혜수 배우 등의 연기가 잘 어우러졌으며,
영화음악도 분위기를 잡아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호평받았습니다.
1,000만 관객 달성은 실패했지만 <명량>, <광해, 왕이 된 남자>, <왕의 남자>에 이어 역대 사극 영화 4위를 기록했습니다.